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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14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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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기(李芑, 1476년 ~ 1552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476년 10월 26일에 태어났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1501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중종반정 이후 정국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장인의 탐관오리 혐의로 인해 연좌되어 삼사와 청요직 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중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명나라 사신 접대, 여진족 토벌 등 변방에서 활약했다. 만년에 권력을 잡고 을사사화에 가담하여 사림의 비판을 받았으며, 말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사후에는 을사사화 관련 훈작이 삭탈되고 묘비가 제거되는 등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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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147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이기
한자 이름李芑
로마자 표기I Gi
문중(文仲)
경재(敬齋)
시호문경공(文敬公)
생애
출생1476년 10월 26일
사망1552년 4월 28일 (향년 75세)
사망 장소조선 한성부 (병사)
가족
아버지이의무(李宜茂)
어머니창녕 성씨 부인
배우자광산 김씨 부인
자녀1남 2녀
친척이순신(친족), 유자미(사돈), 유성원(사돈), 성담수(외숙부)
경력
분야정치인, 문인
과거 급제1496년 진사 시험, 1501년 식년문과 병과 급제
관직함경도 병마절도사, 우의정, 좌의정, 실록 총재관, 영의정
봉작풍성 부원군
공신보익공신 1등
군사 경력
소속 군대조선 육군
복무 기간1514년 ~ 1551년 8월 27일
계급대광보국숭록대부
지휘조선 함경도 병영 도원수
참전건주위 토벌 (1542년)
정치 활동
소속 정당훈구파 세력
기타
종교유교(성리학)

2. 생애

경재 이기(李芑)는 1476년(성종 7) 10월 26일 이의무와 창녕 성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종직의 제자이자 청백리였고, 어머니는 사육신 성삼문의 6촌이었다.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은 그의 외삼촌이었다. 동생 이행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집필에 참여했고, 좌의정과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그의 조카였고, 율곡 이이는 그의 재종조부였다. 화가 이우는 그의 재종손이었다. 이기는 어려서 사육신생육신의 비참한 최후를 보았다.

아버지이의무
어머니창녕 성씨 부인
형제
배우자 및 자녀



자는 문중(文仲), 호는 경재(敬齋)였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아버지의 스승인 김종직에게서 글을 배웠다. 1492년 김종직 사망 후 다른 스승에게서 글을 배웠다. 1496년(연산군 2)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 윤 4월 18일 정성근, 조지서 등의 죄를 논하는데 참여하였다.[1] 그는 서실을 열고 문인들을 가르쳤으며, 김백균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김백균이 식년문과에 갑과로 합격하고 그를 다시 찾아오자 특별히 그를 중임에 천거하기도 했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06년 중종반정 직후 정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2] 1507년 아버지 이의무의 상으로 3년상을 치렀다. 1510년 도체찰사 성희안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전황을 보고했다. 1511년 정시에 합격하고, 무재(武才)가 있는 문신으로 추천받았다.[2] 1515년 선교감 첨정을 거쳐 빈전도감 낭청이 되었다. 장인인 군수 김진(金震)이 탐관오리로 처벌받아 연좌되어 좋은 벼슬을 얻지 못하고 종사관, 종성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했으나, 이언적이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허통(許通)을 위해 노력했다.[3]

1516년 종성부사로 나가 변방을 약탈한 자들을 처벌하고,[4] 이조로부터 '종성이 퇴폐하였는데 이기(李芑)가 겨우 소생시켰다'는 평을 받았다.[5] 1529년 사헌부로부터 직무 태만을 이유로 탄핵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9] 곧 동지돈녕부사,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명나라에 사신을 호송했다. 1530년 김안로와 갈등하여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32년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우윤, 겸임 동지성균관사를 거쳐 1533년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한성부좌윤 재직 시 법사를 모욕한 일로 사헌부의 공격을 받다가 공조참판, 동지중추부사, 예조참판, 한성부판윤을 역임했으나, 김안로 등의 탄핵으로 전라남도 강진에 유배되었다.

1537년 석방, 복권되어 서용되었다. 1538년 예조참판, 한성부 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1539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0] 1540년 형조판서, 상호군, 호조판서를 지냈으나 사헌부의 반박으로 면직, 지중추부사로 지경연사를 겸했다. 11월 30일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1541년 경연특진관, 의정부우참찬,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순변사 겸 도원수로 건주위 여진족을 토벌했다.[10] 이조판서 유관과 고종사촌 유인숙이 이기가 장리의 사위라는 이유로 병조판서 임명을 반대했으나,[10], [11] 국왕의 신임과 이언적의 주장으로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1542년 다시 순변사 겸 도원수로 건주위 여진족을 토벌했다. 1544년 경상도 해안가에 출몰한 왜구를 정리하기 위해 서도 순변사로 출정했다.[14] 7월 도체찰사를 겸하여 경상도 순변 체찰사로 부임, 왜구를 체포하고 전황을 보고했다.

1545년 인종이 즉위한 뒤 조광조를 복직시키고 그의 문하와 김굉필의 문하생들을 다수 등용하였다. 그러나 김굉필조광조의 문인들은 이기가 탐관오리의 사위라는 점을 지적하며 그를 공격하였다. 1월 재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대간이 그가 아무런 공적, 덕망이 없이 찬성에 임명되었다며 문제삼기도 하였다. 1월 13일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하였으나, 대간에서는 그가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계속 공격하였다. 1월 15일 우의정이 된 지 이틀만에 체직되고, 강등되어 보국숭록대부가 되었다. 그러나 대간에서는 그의 자급을 승급한 것조차 옳지 않다고 계속 공격하였고, 이후 그는 김굉필, 조광조의 문인들에 대해 악감정을 품게 된다.

이들은 윤임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등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윤임 등 대윤 일파가 득세하자 대윤은 이기를 재상직에 부적합 인물로 보고 다시 병조판서로 강등시켰다. 한편 그는 인종이 즉위하기 직전 인종의 앞날을 걱정한 이언적의 발언을 윤원로 등에게 알렸다. 이언적은 그에게 '중전(문정왕후)이 동궁(東宮, 인종)을 매우 박대하니 놀라운 생각을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언적의 이 말은 이기 외에는 들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기가 곧 윤원로를 찾아가 누설하였으므로 윤원로이언적을 원망하여 드디어 소원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다시 소문이 났고, 이기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한편 윤원로는 이기를 덕스럽게 여겨 '이기는 이학(理學)에 정통한데 중국에서 찾아보아도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1545년 8월 중순부터 계속 윤임유관, 유인숙을 공격하는데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언적은 언급하지 않고, 이언적을 엮는데 반대하거나 회피한다. 이때 대윤과 소윤(小尹)이 크게 싸우게 되자 이기는 윤원형, 윤원로 등과 손잡고 윤임의 세력을 꺾었다. 윤임 일파를 제거하면서 신진 사림파들 역시 대대적으로 숙청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언적을 공격하자는 윤원형, 윤춘년 등의 주장에는 주저하였다. 8월 23일 다시 우의정에 재임되었다.[16] 이후 유관, 유인숙, 윤임 등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는 탄핵에 가담하였다. 이언적을 공격하는데는 반대하였고 참여하지 않았지만, 윤임 일파를 공격하는 등 을사사화에 참여한 공로로 그해 8월 30일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協贊弘濟保翼功臣) 1등이 되고, 우의정 겸 병조 판서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547년(명종 2년) 의정부 좌의정 겸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세 번의 상소 끝에 병조판서 직에서 물러났다.[17] 그해 말 양재역 벽서 사건 관련자 처벌 상소에 참여하였다. 이후 의정부좌의정으로 실록 총재관을 겸하다가 바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를 반대한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1548년 권력을 농단하고 전횡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이기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여러 번 올려졌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549년(명종 4년) 5월 의정부 영의정이 되었다.[18] 7월 대재앙을 이유로 우의정 심연원과 함께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사면을 건의하여 특별 사면령을 내렸다. 11월에는 선원록을 발간할 때 역적으로 몰렸던 모산수(毛山守)와 무송수(茂松守)의 자손들을 선원록에서 뺄 것을 건의하였다. 10월에 다시 좌의정 심연원, 우의정 상진과 함께 재변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550년(명종 5년) 4월 한성부에 흙비가 내리자 재변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1월 영관상감사를 겸하고, 1551년 5월 신병으로 정장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은 그를 위로하고 반려하였다. 5월 30일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되었다가 6월 23일 봉상시 제조(奉常寺提調)가 되었다. 6월 25일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집에 있었다. 8월 사헌부에서 그가 병으로 출사하지 못함을 들어 체직을 청하였으나 명종이 반려하였다.[18]

1551년 8월 중풍이 발병하였다. 이후 거동이 어렵게 되자 8월 19일 직접 정장을 올려 중풍으로 사직을 청하여 사퇴하였다. 이어 명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고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전직했다. 8월 23일 풍성 부원군(豊城府院君)에 임명되어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할 권한이 주어졌다. 사헌부사간원에서는 그가 음흉하며 왕 이상의 권력을 누린다며 비판하였으나 명종은 이를 듣지 않고 무마시켰다. 9월말에는 윤원형을 다시 의정부 우의정으로 복직시킬 것을 여러번 청하였으나 명종이 거절하였다. 그는 사사로운 원한이라도 있으면 바로 앙갚음을 하였으므로 조정의 대소 관료들도 그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1551년 10월 24일 홍문관 부제학 조사수(趙士秀) 등으로부터 재변과 국정 운영 엉망을 이유로 탄핵을 당했다. 이후 매일 양사에서 그를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11월 2일부터는 그를 쫓아낼 것을 상소하였다. 11월 10일 참찬관 권철(權轍)이 이기가 방납미(防納米) 3백여 섬을 빼돌리고, 공납(貢納)할 물건을 기한 내에 관사(官司)에 납부하지 않았으며, 흉년기때 곡식을 내주는 것을 거부한 것을 폭로하였다.[19] 같은날 대간이 두 차례 그를 탄핵하자 파직당하였다.[20] 그러나 1551년 12월 28일 명종은 그가 공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영중추부사로 복직시켰다. 이후 대간에서 그의 서용을 취소하라고 하였으나 명종이 거부하였다.

1552년 1월 2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조사수(趙士秀) 등이 차자를 올려 그를 탄핵하였다. 이후 1월 3일부터 4월 5일까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으로부터 매일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그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명종은 좌부승지(左副承旨) 남응운(南應雲)을 보내 그를 문병하였다.[21] 1552년 4월 28일 갑자기 병세가 위중하더니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왕은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애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조실록의 사관은 그에게 악평을 가하였다. 왕명으로 예장(禮葬)하여[22] 충청남도 당진군 송산면 도문리 산 79-1번지 봉화산에 안장되었다. 당시 향년 76세였다.

2. 1. 생애 초반

경재 이기는 1476년 10월 26일 이의무와 창녕 성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의무는 김종직의 제자이자 청백리였고, 어머니는 사육신 성삼문의 6촌이었다.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은 그의 외삼촌이었다.

동생 이행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집필에 참여했고, 좌의정과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그의 조카였고, 율곡 이이는 그의 재종조부였다. 화가 이우는 그의 재종손이었다. 이기는 어려서 사육신생육신의 비참한 최후를 보았다.

아버지이의무
어머니창녕 성씨 부인
형제
배우자 및 자녀



자는 문중(文仲), 호는 경재(敬齋)였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아버지의 스승인 김종직에게서 글을 배웠다. 1492년 김종직 사망 후 다른 스승에게서 글을 배웠다. 1496년 (연산군 2)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504년 (연산군 10년) 윤 4월 18일 정성근, 조지서 등의 죄를 논하는데 참여하였다.[1]

그는 서실을 열고 문인들을 가르쳤다. 김백균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김백균이 식년문과에 갑과로 합격하고 그를 다시 찾아오자 특별히 그를 중임에 천거하기도 했다.

2. 1. 1. 출생과 가계

경재 이기는 1476년 10월 26일 연헌(蓮軒) 이의무와 창녕 성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덕수 이씨 이돈수의 11대 손으로, 아버지 이의무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자 청백리였고, 어머니는 창녕 성씨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6촌간이며, 교리를 지낸 성희의 딸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성담수, 성담년이 그의 외삼촌이었다.

동생은 용재(容齋) 이행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집필에 참여했으며, 이행 역시 좌의정과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도 그의 조카였다. 한때 당조카 이원수는 그의 문하에 찾아가 글을 배우려 하였으나 신사임당이 이를 말렸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의 재종조부였다.

화가였던 이우도 그의 재종손이었다. 그는 일찍이 글을 잘 지었으며, 어려서 사육신생육신의 비참한 최후를 접하게 되었다.

아버지이의무
어머니창녕 성씨 부인
형제
배우자 및 자녀


2. 1. 2. 수학과 청년기

그는 자를 문중(文仲)이라 하고 호를 경재(敬齋)라 하였다. 일찍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아버지 이의무의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을 찾아가 그에게 글을 배웠다. 1492년 점필재가 사망하자 다른 스승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1496년(연산군 2)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504년(연산군 10년) 윤 4월 18일 정성근, 조지서 등의 죄를 논하는데 참여하였다.[1]

한편 학문적 소양도 있던 그는 일찍부터 서실을 열고 문인들을 가르쳤다. 그의 문하에서는 김백균 등이 문인으로 배출되었다. 후일 김백균이 식년문과에 갑과로 합격하고 그를 다시 찾아오자 특별히 그를 중임에 천거하기도 했다.

2. 2. 관료 생활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06년 중종반정 직후 정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2] 1507년 아버지 이의무의 상으로 3년상을 치렀고, 1510년 도체찰사 성희안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전황을 보고했다. 1511년 정시에 합격하고, 무재(武才)가 있는 문신으로 추천받았다.[2] 1515년 선교감 첨정을 거쳐 빈전도감 낭청이 되었다.

장인인 군수 김진(金震)이 탐관오리로 처벌받아 연좌되어 좋은 벼슬을 얻지 못하고 종사관, 종성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했다. 그러나 이언적이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허통(許通)을 위해 노력했다.[3]

1516년 종성부사로 나가 변방을 약탈한 자들을 처벌하고,[4] 이조로부터 '종성이 퇴폐하였는데 이기(李芑)가 겨우 소생시켰다'는 평을 받았다.[5] 1529년 사헌부로부터 직무 태만을 이유로 탄핵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9] 곧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명나라에 사신을 호송했다. 1530년 김안로(金安老) 등과 갈등하여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32년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우윤, 겸임 동지성균관사를 거쳐 1533년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한성부좌윤 재직 시 법사를 모욕한 일로 사헌부의 공격을 받다가 공조참판, 동지중추부사, 예조참판, 한성부판윤을 역임했으나, 김안로 등의 탄핵으로 전라남도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다.

1537년 석방, 복권되어 서용되었다. 1538년 예조참판, 한성부 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1539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0] 1540년 형조판서, 상호군(上護軍), 호조판서를 지냈으나 사헌부의 반박으로 면직,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지경연사를 겸했다. 11월 30일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1541년 경연특진관(特進官), 의정부우참찬,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순변사(巡邊使) 겸 도원수(都元帥)로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을 토벌했다.[10] 이조판서 유관과 고종사촌 유인숙이 이기가 장리의 사위라는 이유로 병조판서 임명을 반대했다.[10], [11] 국왕의 신임과 이언적의 주장으로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1542년 다시 순변사 겸 도원수로 건주위 여진족을 토벌했다. 1544년 경상도 해안가에 출몰한 왜구를 정리하기 위해 서도 순변사(西道巡邊使)로 출정했다.[14] 7월 도체찰사를 겸하여 경상도 순변 체찰사(慶尙道巡邊體察使)로 부임, 왜구를 체포하고 전황을 보고했다.

2. 2. 1. 초기 관직 생활과 연좌제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권지 등을 거쳐 정랑으로 재직 중,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반정 직후에는 특별히 정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507년 아버지 연헌 이의무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3년상을 마쳤다. 1510년 4월 도체찰사 성희안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전황을 보고하였다. 1511년 정시에 합격하고[2], 그해 5월 무재(武才)가 있는 문신의 한 사람으로 추천되었다. 1515년 선교감 첨정을 거쳐 그해 3월 선교감 첨정으로 빈전도감 낭청(殯殿都監郞廳)이 되었다.

그의 부계와 외가로는 탐관오리나 죄인은 없었다. 사육신생육신이 그의 외가였지만 중종 때에 이르러 사육신생육신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인인 군수 김진(金震)이 재물을 탐내다가 탐관오리로 장리로 단죄되고 장리안에 들었기 때문에 그도 탐관오리 장인 때문에 연좌되어 좋은 벼슬을 얻지 못하고, 삼사(三司)와 청요직에 진출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밖의 관직이나 외직에 임명될 때마다 사간원사헌부에서 문제삼아 종사관·종성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였다. 그러나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회재 이언적(李彦迪)이 그의 허통(許通[3])을 위해 적극 발벗고 나섰다.

1516년 1월 종성부사(鍾城府使)로 나갔다. 그해 6월 변방을 약탈한 피인(彼人) 아두(阿頭)·감토(甘土) 등을 쫓아가 목을 베었다.[4] 종성부사로 재직 중 그는 수완을 발휘하였는데 이조로부터 '종성이 퇴폐하였는데 이기(李芑)가 겨우 소생시켰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5] 그해 10월 함경도의 진장(鎭將)이 되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승진하였지만, 삼사를 비롯한 청요의 직책이나 6경 등 서경(署經)을 필요로 하는 지위에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가 요직에 오르려 할 때마다 장인 김진이 군수 재직 중 뇌물을 받은 일로 장리(贓吏)의 사위라 하여 반대하였으며, 그의 글재주를 안타깝게 여겨 허통(許通)하려 하자 조정 관원이 모두 안 된다고 하였으나, 이언적이 당시 대사헌으로서 유독 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허통하게 되었다.[6],[7]

2. 2. 2. 변방 근무와 중종의 신임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권지 등을 거쳐 정랑으로 재직 중,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반정 직후 특별히 정국원종공신 1등에도 책록되었다.

1507년 아버지 연헌 이의무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3년상을 마쳤다. 1510년 4월 도체찰사 성희안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전황을 보고하였다. 1511년 정시에 합격하고[2], 그해 5월 무재(武才)가 있는 문신의 한 사람으로 추천되었다. 1515년 선교감 첨정을 거쳐 그해 3월 선교감 첨정으로 빈전도감 낭청(殯殿都監郞廳)이 되었다.

그의 부계와 외가로는 탐관오리나 죄인은 없었다. 사육신생육신이 그의 외가였지만 중종 때에 이르러 사육신생육신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인인 군수 김진(金震)이 재물을 탐내다가 탐관오리로 장리로 단죄되고 장리안에 들었기 때문에 그도 탐관오리 장인 때문에 연좌되어 좋은 벼슬을 얻지 못하고, 삼사(三司)와 청요직에 진출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밖의 관직이나 외직에 임명될 때마다 사간원사헌부에서 문제삼아 종사관, 종성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였다. 그러나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회재 이언적이 그의 허통(許通[3])을 위해 적극 발벗고 나섰다.

1516년 1월 종성부사로 나갔다. 그해 6월 변방을 약탈한 피인(彼人) 아두(阿頭)·감토(甘土) 등을 쫓아가 목을 베었다.[4] 종성부사로 재직 중 그는 수완을 발휘하였는데 이조로부터 '종성이 퇴폐하였는데 이기(李芑)가 겨우 소생시켰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5] 그해 10월 함경도의 진장(鎭將)이 되었다.

2. 2. 3. 중종 후반기 관직 생활

1516년 1월 종성부사(鍾城府使)로 나갔다. 그해 6월 변방을 약탈한 피인(彼人) 아두(阿頭)·감토(甘土) 등을 쫓아가 목을 베었다.[4] 종성부사 재직 중 수완을 발휘하여 이조로부터 '종성이 퇴폐하였는데 이기(李芑)가 겨우 소생시켰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5] 그해 10월 함경도의 진장(鎭將)이 되었다.

1529년(중종 24년) 4월 사헌부로부터 술을 즐기고 활쏘기를 좋아하여 직무에 태만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9] 그러나 이틀 뒤 대간의 탄핵을 받고 체직당하였다. 곧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에 임명되었다가 9월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그해 10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부경사신을 호송하였다. 그 뒤 김안로(金安老) 등과 갈등하다가, 1530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 1532년 6월 동지중추부사, 9월 한성부우윤이 되고 이후 겸임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1533년 1월 본사의 일이 바빠 동지성균관사에서 면직되고, 그해 5월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한성부좌윤 재직 당시 법사를 모욕했다는 일로 사헌부대사헌 심언광(沈彦光)의 탄핵을 당한 뒤, 사헌부로부터 계속 공격을 당하였다. 그해 8월에 공조참판이 되었으나 한성부좌윤 재임당시 법사를 모욕한 일로 사헌부의 공격을 당하다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이어서 예조참판,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으나 그해 김안로 등의 탄핵을 받고 전라남도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다.

1537년 석방되어 풀려나왔고, 곧 복권되었으며 그해 11월 서용되었다. 1538년 2월 예조참판이 되고 5월 한성부 판윤, 그해 10월 공조판서, 12월 형조판서를 지냈다.

2. 2. 4. 김안로와의 갈등, 유배와 복직

1529년(중종 24년) 4월 사헌부로부터 술을 즐기고 활쏘기를 좋아하여 직무에 태만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9] 그러나 이틀 뒤 대간의 탄핵을 받고 체직당하였다. 곧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使)에 임명되었다가 9월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그해 10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부경사신을 호송하였다. 1530년 김안로(金安老) 등과 갈등하다가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32년 6월 동지중추부사, 9월 한성부우윤이 되고 이후 겸임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1533년 1월 본사의 일이 바빠 동지성균관사에서 면직되고, 5월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한성부좌윤 재직 당시 법사를 모욕했다는 일로 사헌부대사헌 심언광(沈彦光)의 탄핵을 당한 뒤, 사헌부로부터 계속 공격을 당하였다. 1533년 8월에 공조참판이 되었으나 한성부좌윤 재임당시 법사를 모욕한 일로 사헌부의 공격을 당하다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이어서 예조참판,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으나 김안로 등의 탄핵을 받고 전라남도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다.

1537년 석방되어 풀려나왔고, 곧 복권되었으며 11월 서용되었다. 1538년 2월 예조참판이 되고 5월 한성부 판윤, 10월 공조판서, 12월 형조판서를 지냈다.

1539년(중종 34년) 진하사(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10] 명나라에 다녀올 때 부사(副使) 원계채(元繼蔡)와 서장관(書狀官) 유공권(柳公權)이 중도에서 사망하는 일을 겪었으나 무사히 귀환하였다. 10월 다시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이때 중종은 그를 병조판서로 천거하려 하였으나 유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540년 1월 형조판서, 7월 상호군(上護軍), 호조판서를 지냈다. 호조판서가 되자 7월 20일 사헌부로부터 적임자가 아니라는 논박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7월 21일 사헌부에서 재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며 이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지경연사를 겸하여 경연장에 참여하였다. 11월 30일 다시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1541년 4월 경연특진관(特進官), 6월 의정부우참찬, 8월 다시 의정부 우참찬이 되고, 9월 10일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닷새만인 9월 15일 병조판서가 되었다.

2. 2. 5. 유관 등과의 갈등

1541년 순변사(巡邊使) 겸 도원수(都元帥)로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을 토벌하였다.[10] 이 공로로 국왕이 병조판서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이조판서 유관이 장리의 사위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10] 고종사촌 유인숙도 병조판서 임명을 반대하였다. 이기는 이를 잊지 않았고, 훗날 유관과 유인숙은 보복당했다. 국왕의 신임과 이언적의 주장으로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로 발탁되었다.[10] 같은 해 7월 유인숙이 이조판서인 점을 들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11]

중종은 이기의 경력과 능력을 들어 병조판서에 임명하려 했으나, 이조판서 유관이 '탐관오리의 사위인데 어찌 재상직에 앉히느냐'며 반대하고 사헌부사간원도 임명을 반대하였다. 결국 이기는 중종의 의중과 이언적의 천거로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2. 2. 6. 여진 토벌과 중종의 신뢰

1541년 순변사(巡邊使) 겸 도원수(都元帥)로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을 토벌하였다.[10] 그 공로로 국왕이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이조판서 유관(柳灌)이 장리의 사위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10] 중종의 신임과 이언적의 추천으로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발탁되었다.

중종은 이기의 능력으로 보아 병조판서에 적합하다고 판단했지만, 이조판서 유관(柳灌)은 이기가 탐관오리의 사위라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고, 사헌부사간원도 이에 동조하였다. 결국 이기는 이언적의 천거와 중종의 의지로 형조판서에 오를 수 있었다.

1542년 10월 다시 순변사(巡邊使) 겸 도원수(都元帥)로 임명되어 건주위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2. 2. 7. 왜구 토벌

1544년 5월 경상도 해안가에 출몰한 왜구들이 소란을 일으키자, 이기는 특별히 서도 순변사(西道巡邊使) 직함을 받고 출정하였다.[14]

그해 7월 도체찰사를 겸하여 경상도 순변 체찰사(慶尙道巡邊體察使)로 부임하여 사은숙배를 하였다. 이후 수시로 해안가로 올라오는 왜구를 체포하여 처리하고, 전황을 보고하였다. 9월에는 왜구들을 정리하고 귀환하였다.

2. 3. 생애 후반

1545년 인종이 즉위한 뒤 조광조를 복직시키고 그의 문하와 김굉필의 문하생들을 다수 등용하였다. 그러나 김굉필조광조의 문인들은 이기가 탐관오리의 사위라는 점을 지적하며 그를 공격하였다. 1545년 1월 재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대간이 그가 아무런 공적, 덕망이 없이 찬성에 임명되었다며 문제삼기도 하였다. 1월 13일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하였으나, 대간에서는 그가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계속 공격하였다.

1월 15일 우의정이 된 지 이틀만에 체직되고, 강등되어 보국숭록대부가 되었다. 그러나 대간에서는 그의 자급을 승급한 것조차 옳지 않다고 계속 공격하였고, 이후 그는 김굉필, 조광조의 문인들에 대해 악감정을 품게 된다. 이들은 윤임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등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윤임(尹任) 등 대윤 일파가 득세하자 대윤은 이기를 재상직에 부적합 인물로 보고 다시 병조판서로 강등시켰다. 한편 그는 인종이 즉위하기 직전 인종의 앞날을 걱정한 이언적의 발언을 윤원로 등에게 알렸다.

이언적은 그에게 '중전(문정왕후)이 동궁(東宮, 인종)을 매우 박대하니 놀라운 생각을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언적의 이 말은 이기 외에는 들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기가 곧 윤원로를 찾아가 누설하였으므로 윤원로이언적을 원망하여 드디어 소원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다시 소문이 났고, 이기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한편 윤원로는 이기를 덕스럽게 여겨 '이기는 이학(理學)에 정통한데 중국에서 찾아보아도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1545년 8월 중순부터 계속 윤임유관, 유인숙을 공격하는데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언적은 언급하지 않고, 이언적을 엮는데 반대하거나 회피한다. 이때 대윤과 소윤(小尹)이 크게 싸우게 되자 이기는 윤원형(尹元衡), 윤원로 등과 손잡고 윤임의 세력을 꺾었다. 윤임 일파를 제거하면서 신진 사림파들 역시 대대적으로 숙청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언적을 공격하자는 윤원형, 윤춘년 등의 주장에는 주저하였다. 8월 23일 다시 우의정에 재임되었다.[16] 이후 유관, 유인숙, 윤임 등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는 탄핵에 가담하였다.

이언적을 공격하는데는 반대하였고 참여하지 않았지만, 윤임 일파를 공격하는 등 을사사화에 참여한 공로로 그해 8월 30일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協贊弘濟保翼功臣) 1등이 되고, 우의정 겸 병조 판서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547년(명종 2년) 의정부 좌의정 겸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세 번의 상소 끝에 병조판서 직에서 물러났다.[17] 그해 말 양재역 벽서 사건 관련자 처벌 상소에 참여하였다. 이후 의정부좌의정으로 실록 총재관을 겸하다가 바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를 반대한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1548년 권력을 농단하고 전횡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이기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여러 번 올려졌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549년(명종 4년) 5월 의정부 영의정이 되었다.[18] 7월 대재앙을 이유로 우의정 심연원과 함께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사면을 건의하여 특별 사면령을 내렸다. 11월에는 선원록을 발간할 때 역적으로 몰렸던 모산수(毛山守)와 무송수(茂松守)의 자손들을 선원록에서 뺄 것을 건의하였다. 10월에 다시 좌의정 심연원, 우의정 상진과 함께 재변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550년(명종 5년) 4월 한성부에 흙비가 내리자 재변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1월 영관상감사를 겸하고, 1551년 5월 신병으로 정장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은 그를 위로하고 반려하였다. 5월 30일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되었다가 6월 23일 봉상시 제조(奉常寺提調)가 되었다. 6월 25일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집에 있었다. 8월 사헌부에서 그가 병으로 출사하지 못함을 들어 체직을 청하였으나 명종이 반려하였다.[18]

8월 중풍(中風)이 발병하였다. 이후 거동이 어렵게 되자 8월 19일 직접 정장을 올려 중풍으로 사직을 청하여 사퇴하였다. 이어 명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고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전직했다. 8월 23일 풍성 부원군(豊城府院君)에 임명되어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할 권한이 주어졌다. 사헌부사간원에서는 그가 음흉하며 왕 이상의 권력을 누린다며 비판하였으나 명종은 이를 듣지 않고 무마시켰다. 9월말에는 윤원형을 다시 의정부 우의정으로 복직시킬 것을 여러번 청하였으나 명종이 거절하였다.

2. 3. 1. 대윤, 급진사림과의 갈등

인종이 즉위한 뒤 조광조를 복직시키고 그의 문하와 김굉필의 문하생들을 다수 등용하였다. 그러나 김굉필조광조의 문인들은 이기가 탐관오리의 사위라는 점을 지적하며 그를 공격하였다. 1545년 1월 재상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대간이 그가 아무런 공적, 덕망이 없이 찬성에 임명되었다며 문제삼기도 하였다. 1월 13일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그가 우의정이 되자 대간에서는 그가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계속 공격하였다.

1월 15일 우의정이 된 지 이틀만에 체직되고, 강등되어 보국숭록대부가 되었다. 그러나 대간에서는 그의 자급을 승급한 것조차 옳지 않다고 계속 공격하였고, 이후 그는 김굉필, 조광조의 문인들에 대해 악감정을 품게 된다. 이들은 윤임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등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윤임(尹任) 등 대윤 일파가 득세하자 대윤은 이기를 재상직에 부적합 인물로 보고 다시 병조판서로 강등시켰다. 한편 그는 인종이 즉위하기 직전 인종의 앞날을 걱정한 이언적의 발언을 윤원로 등에게 알렸다.

이언적은 그에게 '중전(문정왕후)이 동궁(東宮, 인종)을 매우 박대하니 놀라운 생각을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언적의 이 말은 이기 외에는 들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기가 곧 윤원로를 찾아가 누설하였으므로 윤원로이언적을 원망하여 드디어 소원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다시 소문이 났고, 이기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한편 윤원로는 이기를 덕스럽게 여겨 '이기는 이학(理學)에 정통한데 중국에서 찾아보아도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1545년 8월 중순부터 계속 윤임유관, 유인숙을 공격하는데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언적은 언급하지 않고, 이언적을 엮는데 반대하거나 회피한다. 이때 대윤과 소윤(小尹)이 크게 싸우게 되자 이기는 소윤 윤원형(尹元衡), 윤원로 등과 손잡고 대윤 윤임(尹任)의 세력을 꺾었다. 윤임 일파를 제거하면서 신진 사림파들 역시 대대적으로 숙청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언적을 공격하자는 윤원형, 윤춘년 등의 주장에는 주저하였다. 8월 23일 다시 우의정에 재임되었다.[16] 이후 유관, 유인숙, 윤임 등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는 탄핵에 가담하였다.

2. 3. 2. 을사사화 가담

1545년(명종 즉위) 의정부우의정이 되었다가 곧 병조판서를 겸하였다. 그해 8월 중순부터 계속 윤임유관, 유인숙을 공격하는데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언적은 언급하지 않고, 이언적을 엮는데 반대하거나 회피하였다. 이때 대윤과 소윤(小尹)이 크게 싸우게 되자 이기는 윤원형(尹元衡), 윤원로 등 소윤과 손잡고 윤임을 비롯한 대윤 세력을 꺾었다. 윤임 일파를 제거하면서 신진 사림파들 역시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그러나 이언적을 공격하자는 윤원형, 윤춘년 등의 주장에는 주저하였다. 8월 23일 다시 우의정에 재임되었다.[16] 이후 유관, 유인숙, 윤임 등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는 탄핵에 가담하였다.

이언적을 공격하는데는 반대하였고 참여하지 않았지만, 윤임 일파를 공격하는 등 을사사화에 참여한 공로로 그해 8월 30일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協贊弘濟保翼功臣) 1등이 되고, 우의정 겸 병조 판서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2. 3. 3. 양재역 벽서 사건과 기로소 입사

1547년(명종 2년) 의정부 좌의정 겸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세 번의 상소 끝에 병조판서 직에서 물러났다.[17] 그해 말 양재역 벽서 사건 관련자 처벌 상소에 참여하였다. 이후 의정부좌의정으로 실록 총재관을 겸하다가 바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한편 이 무렵 그를 반대한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1548년 권력을 농단하고 전횡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이기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여러 번 올려졌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2. 3. 4. 영의정 재임과 은퇴

1549년(명종 4년) 5월 의정부 영의정이 되었다.[18] 7월 대재앙을 이유로 우의정 심연원과 함께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사면을 건의하여 특별 사면령을 내렸다. 11월에는 선원록을 발간할 때 역적으로 몰렸던 모산수(毛山守)와 무송수(茂松守)의 자손들을 선원록에서 뺄 것을 건의하였다. 그해 10월에 다시 좌의정 심연원, 우의정 상진과 함께 재변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550년(명종 5년) 4월 한성부에 흙비가 내리자 재변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해 11월 영관상감사를 겸하고, 1551년 5월 신병으로 정장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은 그를 위로하고 반려하였다. 5월 30일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되었다가 6월 23일 봉상시 제조(奉常寺提調)가 되었다. 6월 25일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집에 있었다. 그해 8월 사헌부에서 그가 병으로 출사하지 못함을 들어 체직을 청하였으나 명종이 반려하였다.[18]

그해 8월 중풍(中風)이 발병하였다. 이후 거동이 어렵게 되자 8월 19일 그는 직접 정장을 올려 중풍으로 사직을 청하여 사퇴하였다. 이어 명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고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전직했다. 8월 23일 풍성 부원군(豊城府院君)에 임명되어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할 권한이 주어졌다. 사헌부사간원에서는 그가 음흉하며 왕 이상의 권력을 누린다며 비판하였으나 명종은 이를 듣지 않고 무마시켰다. 9월말에는 윤원형을 다시 의정부 우의정으로 복직시킬 것을 여러번 청하였으나 명종이 거절하였다.

2. 4. 최후

1551년 8월 중풍이 발병하였다. 이후 거동이 어렵게 되자 8월 19일 직접 정장을 올려 중풍으로 사직을 청하여 사퇴하였다. 이어 명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고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전직했다. 8월 23일 풍성 부원군(豊城府院君)에 임명되어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할 권한이 주어졌다. 사헌부사간원에서는 그가 음흉하며 왕 이상의 권력을 누린다며 비판하였으나 명종은 이를 듣지 않고 무마시켰다. 9월말에는 윤원형을 다시 의정부우의정으로 복직시킬 것을 여러번 청하였으나 명종이 거절하였다.[18] 그는 사사로운 원한이라도 있으면 바로 앙갚음을 하였으므로 조정의 대소 관료들도 그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1551년 10월 24일 홍문관 부제학 조사수(趙士秀), 직제학 이탁(李鐸), 전한 윤춘년(尹春年), 응교 우상(禹鏛), 부응교 정종영(鄭宗榮), 교리 정유(鄭裕)·이감(李戡), 부교리 왕희걸(王希傑), 수찬 허엽(許曄), 부수찬 김귀영(金貴榮)·유순선(柳順善), 저작 김여부(金汝孚) 등으로부터 재변과 국정 운영 엉망을 이유로 탄핵을 당했다. 이후 매일 양사에서 그를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11월 2일부터는 그를 쫓아낼 것을 상소하였다. 11월 10일 참찬관 권철(權轍)이 이기가 방납미(防納米) 3백여 섬을 빼돌리고, 공납(貢納)할 물건을 기한 내에 관사(官司)에 납부하지 않았으며, 흉년기때 곡식을 내주는 것을 거부한 것을 폭로하였다.[19] 같은날 대간이 두 차례 그를 탄핵하자 파직당하였다.[20] 그러나 1551년 12월 28일 명종은 그가 공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영중추부사로 복직시켰다. 이후 대간에서 그의 서용을 취소하라고 하였으나 명종이 거부하였다.

1552년 1월 2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조사수(趙士秀) 등이 차자를 올려 그를 탄핵하였다. 이후 1월 3일부터 4월 5일까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으로부터 매일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그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명종은 좌부승지(左副承旨) 남응운(南應雲)을 보내 그를 문병하였다.[21]

1552년 4월 28일 갑자기 병세가 위중하더니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왕은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애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조실록의 사관은 그에게 악평을 가하였다.

왕명으로 예장(禮葬)하여[22] 충청남도 당진군 송산면 도문리 산 79-1번지 봉화산에 안장되었다. 당시 향년 76세였다.

3. 사후

선조 즉위 후 을사사화가 날조로 밝혀지면서 훈신들의 훈작(勳爵)이 추삭(追削)되었다. 1567년 선조 즉위 후 이준경이 그의 묘비를 넘어트리고 삭탈관직과 삭훈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23] 이후 윤원형 등과 함께 을사사화의 원흉(元兇)으로 지목되고, 사림에게 해를 가했다 하여 심통원, 이량, 이감 등과 함께 선조 초년 언관들의 맹비난을 받고 묘비(墓碑)도 제거되었다.[23]

그에게 원한을 품은 누군가가 아들 이원우와 구엄 집안의 결혼식 날 사람의 목을 베고는 종이에 이기(李芑) 라는 글자를 써서 붙였으므로 이원우 집의 가인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기절하였다.[23] 글재주에 능하여 여러 작품을 남겼으나 사림이 집권하면서 몰락하였으므로 저서와 작품은 대부분 사라졌다.[23]

4. 가족

관계이름
아버지이의무
어머니창녕 성씨
누나덕수 이씨
이위
이권
남동생이행
남동생이영
남동생이봉
배우자김씨 (김진의 딸)
덕수 이씨
아들이원우


5. 평가와 비판

이기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와 1542년 도원수로 여진족을 토벌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27] 이장곤은 이기를 "육진의 소임을 맡으면서 여진족들이 우리 나라에 인물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계책과 생각이 장원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27]

만년에 권력을 농단하고 을사사화로 사림을 숙청한 것은 후일 사림에게 비판받는 점이다.[1] 당시 윤원형, 심통원과 함께 이기를 3흉(凶)이라 하고, 정순붕, 임백령, 정언각을 3간(奸)이라 불렀다.[1]

5. 1. 평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1542년 도원수로 여진족을 토벌한 것이 높이 평가된다.[27]

이장곤(李長坤)은 이기를 "매양 육진(六鎭)의 소임으로 있었으며, (여진족들이) 우리 나라에 인물이 부족한 것 같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계책과 생각이 장원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27]

5. 2. 비판

청렴하고 재물 욕심이 없었으나 만년에 권력을 농단하였으며 을사사화로 사림을 숙청한 것이 후일 사림에 의해 비난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1] 당시 세상에서는 윤원형, 심통원, 이기를 3흉(凶)이라 하고, 정순붕, 임백령, 정언각을 3간(奸)이라 불렀다.[1]

6. 일화

아버지 이의무에게서 배웠고 나중에는 점필재 김종직을 직접 찾아가 배웠다. 어느 날 개성의 은일사 화담 서경덕과 학문을 논하였으나, 서경덕이 끝내 그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자 화를 냈다고 한다.[28]

유인숙은 이기와 내외종 형제간이었다.[29] 한번은 이기가 그의 누이의 외손 한경직에게 편지 심부름을 시켰는데, 그 집 종이 잘못하여 윤원형과 이기가 내통한 그 편지를 유인숙에게 전달하였다. 당시 이기와 유인숙이 모두 판서로 있었기 때문에 "판서 댁에 전하라"는 말을 유 판서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사촌 유인숙이 이 편지를 사림에 알려, 유인숙은 이기의 분노를 샀다. 어렸을 때부터 절의를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겼던 그는 화를 당하여 아들 4형제와 함께 참혹하게 죽었다.[29]

7. 기타

생육신 성담수성담년은 그의 외삼촌이고, 사육신 성삼문은 외재종숙이며 성승은 외재종조이다.[1]

또한 학자 이행의 형이고, 대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사촌 형제인 이천의 손자로 그의 종손이었다.[1] 신사임당은 그의 당질부였다.[1]

이언적은 이기를 두고 음험하다는 말을 했다가 이 말이 그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보복을 당한다.[1] 결국 이언적은 이기의 보복을 피할 수 없어 삭탈관직 당해 귀양을 가기도 했으나 그는 자신의 허통을 위해 노력했다 하여 사형은 모면하게 해주었다.[1]

참조

[1] 문서 연산군일기 53권, 연산군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윤4월 17일(정축) 4번째기사 "유순·허침·박숭질 등의 정성근·조지서의 죄에 대한 논의"
[2] 문서 중종 13권, 6년(1511 신미 / 명 정덕(正德) 6년) 4월 17일(병신) 2번째기사 "정시 합격자에게 상주다"
[3] 문서 서자, 서얼, 중인 외에도 탐관오리의 자제 등도 허통을 통해서 청요직에 나가게 되었다.
[4] 문서 중종실록 25권, 중종 11년(1516 병자 / 명 정덕(正德) 11년) 6월 4일(갑인) 5번째기사 "동관 성 밑에 사는 피인 이두·감토 등이 노략질을 일삼으니 목을 베어 바치다"
[5] 문서 중종실록 34권, 중종 13년(1518 무인 / 명 정덕(正德) 13년) 7월 22일(기미) 3번째기사 "유옥을 당상에 올려 종성 부사에 의망하다"
[6] 문서 서자와 노비, 중인 외에도 탐관오리의 자손, 역적의 가까운 친족들 역시 청요직에 앉을 수 없었다.
[7] 문서 그러나 이기는 후에 윤원형 등과 손잡고 을사사화에 가담하는데, 이언적은 이때 숙청된다.
[8] 문서 중종 46권, 17년(1522 임오 / 명 가정(嘉靖) 1년) 9월 19일(임술) 1번째기사 "경회루 아래에서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이기·허관·이환에게 말을 하사하다"
[9] 문서 중종 65권, 24년(1529 기축 / 명 가정(嘉靖) 8년) 4월 22일(정해) 1번째기사 "헌부에서 박광필의 파직을, 간원에서 경상도 관찰사 이기의 체직을 건의하다"
[10] 웹인용 이기: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http://people.aks.ac[...] 2011-05-15
[11] 문서 중종 98권, 37년(1542 임인 / 명 가정(嘉靖) 21년) 7월 13일(신유) 1번째기사 "병조 판서 이기가 사직을 건의하다"
[12] 문서 중종실록 99권, 중종 37년(1542 임인 / 명 가정(嘉靖) 21년) 9월 24일(신미) 1번째기사 "이기가 학문에 힘쓸 것과 관리 임용에 대신의 책임을 아뢰다"
[13] 문서 중종실록 101권, 38년(1543 계묘 / 명 가정(嘉靖) 22년) 10월 16일(정해) 1번째기사 "승지·이조 참판·지사 등이 안성에 갇힌 맹인 김철정의 일을 아뢰다"
[14] 문서 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1544 갑진 / 명 가정(嘉靖) 23년) 5월 30일(정묘) 2번째기사 "남쪽 왜노를 거절하는 일은 서도 순변사 이기에게 처리하도록 하다"
[15] 문서 명종실록 1권, 명종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7월 7일(정묘) 3번째기사 "윤인경 등이 인종이 명종을 해치려 한다고 한 윤원로에 대한 치죄를 청하다"
[16] 문서 병조판서에는 권벌이 임명된다.
[17] 문서 명종 5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嘉靖) 26년) 5월 15일(을축) 1번째기사 "좌의정 이기가 겸임한 병조 판서의 체직을 세 번 청해 허락하다"
[18] 문서 명종실록 12권, 명종 6년(1551 신해 / 명 가정(嘉靖) 30년) 8월 17일(임신) 2번째기사 "사헌부에서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는 영의정 이기의 체직을 청했으나 불허하다"
[19] 문서 명종 12권 6년 11월 10일 (갑오) 1번째기사 / 조강에 나가자 참찬관 권철이 이기의 비리를 말하다
[20] 문서 명종 12권 6년 11월 10일 (갑오) 3번째기사 / 양사에서 이기와 이무강의 찬축을 두 번 청하자 이기를 파직시키다
[21] 문서 명종 13권, 7년(1552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8일(경진) 2번째기사 "영부사 이기의 병이 위급해져 좌부승지를 보내 문병하다"
[22] 문서 명종실록 13권, 명종 7년(1552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8일(경진) 5번째기사 "이기의 장례에 관한 일을 준비하게 하다"
[23] 문서 선조실록 1권, 선조 즉위년(1567년) 10월 12일(계사) 2번째기사
[24] 문서 선원록 참고
[25] 문서 성삼문의 당숙이자 성승의 4촌으로 사육신 사건에 연좌되어 유배됐다.
[26] 문서 또는 이환(李芄)
[27] 문서 중종실록 36권, 중종 14년(1519 기묘 / 명 정덕(正德) 14년) 9월 5일(병신) 1번째기사 "사정전에서 전경 문신들을 전강하고, 의주 목사와 경원 부사, 경상도 수사의 직을 의논하다"
[28] 문서 명종 13권, 7년(1552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8일(경진) 4번째기사 "영부사 이기의 졸기"
[29]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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